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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한사랑회복수기 최우수작 - 무제(無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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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OO님 작성일19-08-24 10:50 조회17,78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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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공기가 이불 속으로 스며들어 나를 깨웠다. 눈을 떠보니 주위는 온통 까맣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손을 더듬거려 핸드폰을 보니 저녁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벌써 보름 째... 아무것도 먹지도 못하고 움직임도 거의 없이 난 시체처럼 침대에 누워 있었다. 술로 인해 모든 연락이 단절되고 나는 시골에 빈집에 고립되어 하루하루 무의미하게 버텨가고 있었다. 고통스런 명치통증이 또 다시 시작되어 나를 괴롭힌다. 엄청난 고통에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루에 수백번 생각했다. 결국 포기하면 이러다 죽겠지 하고 생각했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구나... 내 인생에 반전은 없었다. 모두가 예상한대로 내 인생은 그들의 말처럼 결국 이렇게 끝나고 있었다. 눈이 감기기 시작한다. 차라리 이대로 눈 감고 영원히 깨지 않으면 고통도 없고 편안해 질거라 생각했다. 금단현상이 다시 시작된다. 환청과 환촉이 날이 갈수록 더 하는 것 같다. 아버지가 나를 부르는 소리도 들린다. 또 시작이라 생각하며 눈을 감는다. 눈 앞이 갑자기 환하게 밝은 느낌이 들어 흐린 눈으로 겨우 고개를 들어보니 아버지가 나를 보고 계셨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도 못한 채 멍하니 보고 있다. 순간 몸이 일으켜지며 아버지가 나를 안고 우셨다. 왜 이렇게 사냐며, 니가 원한 삶은 이게 아니지 않냐며, 되려 당신이 미안하다며 한참을 그렇게 아버지 품에 안겨 있었다. 그래, 아버지 말씀이 맞다. 나도 한때는 꿈 많던 소년이었고 미래를 계획하던 청년이었고 직장에 다니는 사회인이었다. 알코올 중독자가 되기 전에는... 아버지 품에 안겨 있으니 살고 싶어졌다. 아니 전부터 나는 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난 내 처지를 비관하며 죽고 싶었던게 아니라 이렇게 살기 싫은 것이었다. 2017년 12월 24일 모두 성탄절 이브를 맞아 즐거운 시간을 나눌 때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로 죽어가는 나를 살리러 오셨다. 그렇게 나는 알코올 중독임을 인정하고 한사랑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한사랑병원에 입원한 날 나는 조금 무섭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알코올 전문 병원이지만 밖에서는 흔히 정신병원이라는 인식이 더 컸기 때문이다. 며칠을 생활하다보니 차츰 적응되어 갔고 이렇게 저렇게 알게 된 환우들의 입원배경을 들어보니 정말 난 지금껏 보지도 듣지도 못한 엄청난 중독자들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나는 그들과 다르다고 나를 부정하고 있었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다 같은 중독자임을 모른 채... 그럼 도대체 나는 그들과 무엇이 다르며 나를 부정했던 걸까 생각해보았다. 그렇게 점점 과거로 기억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첫 술잔은 호기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마음의 상처가 남아있는 불우한 가정환경도 아니었고 학교생활이 힘들지도 않았다. 가끔 부모님이 심하게 다투시긴 하셨지만 그런 이유로 나를 학대하거나 화풀이를 하지는 않으셨다. 가끔 아버지와 나의 다른 성향에 부딪힘이 조금 있었다. 매사에 정확히 공과사를 구분하시고 성격이 급하셨던 아버지는 느리고 수동적인 나를 답답해 하셨다. 훈육을 하실 때 방식이 조금 강하셔서 나는 주눅이 들곤 했었고 종종 눈치를 보기도 했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내 성격에 아버지는 더 답답해 하셨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이렇게 되기까지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는 할 수 없다. 수능이 끝난 어느 날 친구들과 모여 이제 우리도 성인이라며 어른들의 흉내를 내고 싶은 마음에 술을 먹게 되었다. 이 것이 내 인생에서의 처음 접했던 술이며 술자리였다. 맛은 쓰고 없었지만 한잔 두잔 먹다보니 기분도 좋아지고 친구들과 함께 떠들고 얘기하는 그 분위기가 참 좋았다. 나는 그 때 술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잘만 이용하면 이렇게 즐겁게 마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진짜 성인이 된 후 우리는 그 때의 그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가끔씩 모여 술자리를 가졌고 어느 새 그 모임은 주 4~5회로 늘어가며 어느새 술과 함께하는 밤으로 바뀌고 있었다. 술도 적당히 잘 마시면 좋은 것이라 생각했던 나는 병원에서 알게된 사실을 그 때는 미처 몰랐었다. 술에 대한 내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몇 잔이면 기분 좋던 그 술이 점점 1병, 2병이 되어가고 흔히들 말하는 술이 늘어가고 있었다. 주위에서 술 잘 마신다며 술자리에 꼭 나를 불렀고 그 것이 후에 독이 되는 줄도 모르고 우쭐해진 나는 자랑인냥 독을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수능이 끝나고 느꼈던 친구들과의 그 분위기가 목적이었던 술자리는 이제 단순히 술이 목적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나를 부르는 횟수보다 내가 먼저 술을 먹자며 연락을 하게 되는 횟수가 점점 더 많아졌다. 어느 샌가 술자리가 끝나면 한잔만 더 하자며 사람들을 잡아놓기 시작했고 나의 이런 행동에 술이 조금 과하다며 충고를 하는 친구나 사람들을 나는 비웃으며 보란 듯이 더 먹기 시작했다. 매일 반복되는 이런 일상에 군대에 소집되면서 나의 술버릇은 잠시 멈췄지만 제대 후 어머니가 감자기 암으로 돌아가시면서 나는 술잔을 다시 잡기 시작했다. 이전 까지 절대 혼자서 술을 먹어보지 않았던 나는 집에 혼자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거의 2달을 매일 술을 먹으며 지냈다. 급격히 불어나는 체중에 나는 내 몸이 서서히 망가지는 줄 모른 체 술잔을 놓지 않았다. 보다 못한 아버지는 나를 사촌형이 있는 울산으로 나를 보내셨고 그 때만 해도 이렇게 계속 술만 먹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나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울산으로 가게 되었다. 사촌형의 소개로 좋은 직장을 들어갔지만 숙식을 하면서 조금씩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1칸 짜리 단칸방에서 숙식을 해결했던 나는 퇴근 후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다시 술의 힘을 빌리곤 했다. 연고도 아니고 외지에서 혼자 이렇게 지내는 나를 외롭고 불쌍히 여겨 술은 나의 친구라고 나 자신을 합리화 시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잦은 음주와 책임감 없는 행동으로 회사에서의 적응력이 떨어지면서 자존감과 자존심이 무너질때마다 술을 찾았고 결국은 무단 결근과 잦은 지각으로 이전 탓에 회사에서 퇴사하게 되었다. 모든 사실을 알고 계시는 아버지는 그래도 자식이라며 김해에 있는 집에 들어와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며 기회를 주셨지만 난 또 그 기회를 술을 먹을 수 있는 기회이자 절호의 찬스로 바뀌게 되었다. 방에서 몰래 숨어서 술 마시고 들켜서 또 싸우고 그것이 반복되어 결국은 집 근처 원룸으로 다시 독립을 했지만 결과는 물 보듯 뻔했다. 술을 먹다 먹다 보증금까지 깎아가며 술을 마셨고 그 때 처음 환청과 환촉을 느꼈다. 이 일로 인해 집안어르신께서 몸도 마음도 지쳐 바닥을 치고 있는 나에게 고모가 운영하는 조용한 요양원이 있으니 몸도 회복하고 생각도 정리할 겸 거기서 지내보라고 권유하셨고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던 나는 그러겠다고 하며 문경으로 가게 되었다. 나를 문경에 데려다 주시고 돌아가시며 눈물을 훔치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지금껏 술로 인해 내가 저지른 실수들과 잘못들을 반성하며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요양원에서 금주 생활을 하면서 노인분들의 식사나 목욕도 도와드리고 이런저런 허드렛일도 하면서 점점 내 자신이 바뀌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규칙적인 생활과 금주만으로 이렇게 삶이 바뀔지는 상상도 못했었다. 숙취가 없는 아침, 술 없이도 잠을 잘 수 있는 밤들이 늘어가며 새삼 사람이 이렇게 밝고 건강하게 자신있게 잘 수도 있다는 걸 느꼈다. 그렇게 금주 생황을 이어가던 중 고모가 추천한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고 정직원으로 일하면서 1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요양원의 빈방에서 숙식을 해결했던 나는 고모의 권유로 근처에 조그만 집을 하나 얻었고 거기서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일하면서 직급도 바뀌고 하는 일도 바뀌면서 점점 반복되는 업무와 직업적인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고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며 멍하게 생각의 끈을 놓아버리는 시간만 늘어만 갔다. 거의 1년 째 금주하던 나는 또 다시 오만함과 자만심에 타협하며 술병을 쥐고 ‘이 정도 괜찮아. 그 동안 참을 만큼 참았고 노력했으니 이 정도는 보상이야’라는 생각을 하며 합리화를 시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다시 반복되는 거짓말과 음주로 인해 나태해진 정신력, 책임감 없는 업무처리로 여기저기서 나에게 하는 충고들을 잔소리로 여기며 퇴사하고 나를 지탱해준 금주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렸다. 나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내가 얼마큼 노력했는지 얼마나 절실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결국 술잔을 들었으며 지난 시간들을 비웃고 있었다. 그렇게 술로 탕진하며 경제적인 압박과 몸이 망가지면서 2017년 12월 24일의 나를 살리러 오신 아버지와의 그날 밤을 맞게 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들과 다르지 않다. 그들도 나도 똑같은 중독자이다. 내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자체가 나를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나를 진짜 알코올 중독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다시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으며 병원에서 정말 열심히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교육과 프로그램 등 도움이 될만 한 것들은 모두 해보았고 언젠가 사회에 적응해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나를 꿈꾸며 재활에 힘썼다. 6개월의 병원생활에 부모님도 나의 믿음에 다시 기대를 거시며 나는 그렇게 퇴원하게 되었다. 나는 혼자서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문경의 빈 집으로 가기를 원했고 부모님의 걱정도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며 자신감을 보였고 그렇게 부모님을 설득하여 문경으로 다시 가게 되었다. 그렇게 2번째 나의 금주생활이 시작되었다. 마무리 짓지 못한 자격증 시험도 다시 시작하고 1달에 한 번 외래도 꾸준히 가고 병원행사에 참석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끔 충동이나 갈망이 생길 땐 운동이나 산책으로 대신하고 그것도 안 될 때는 담당 복지사님께 전화를 걸어 솔직한 심정을 얘기하며 위기를 넘기곤 했다. 복지사님과의 통화는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혹시나 솔직한 내 마음을 부모님이나 다른 누군가에게 얘기했을 때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복지사님과는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수 있어 도움이 많이 되었던 것 같다. 요양원의 고모의 도움 없이도 나는 할 수 있다는 것을 무슨 작은 일이라도 혼자서 마무리 짓는 모습을 꼭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었다. 나를 믿고 퇴원을 결정해준 부모님에게 정말 이번 만큼은 실망시켜 드리지 않고 싶었다. 그렇게 생활을 이어가던 중 가끔 외래를 빠질 때가 있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부모님과 나의 생각이 엇갈리면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마찰이 잦아지면서 내 안에서는 또 이상한 생각들이 스물스물 기어올라오기 시작했다. 나와는 전혀 다른 가치관의 부모님과 옳고 그름을 놓고 다투기 시작했고 서로가 양보없이 서로를 이해해주기만을 바랬다. 그리고 욕심이 지나쳤던 것일까 뭐라도 해내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에 무리하면서 자격증 수업 일정을 계획하는 바람에 학업적인 스트레스까지 겹치기 시작했고 보이지 않던 충돌과 갈망들이 점점 나의 목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퇴원 후 5개월이 지난 시점 나는 예전에 나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아니다. 그 동안 내가 저지른 잘못과 실수들 한 두 번이 아님에도 계속 믿고 믿어준 가족들, 부모님의 눈물,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 노력했던 병원생활들을 생각하며 참고 참았지만 눈을 뜬 어느 날 아침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술병을 보고 나는 또 한번 실패하고 말았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 나를 치료하고 회복을 위해 도움을 줬던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나는 다시 술을 마시고 말았다. 여기서라도 멈춰야 했다. 실수라 생각하고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하면 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는지 모른다. 나는 ‘금주는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며, 나 같은 중독자가 술을 어떻게 끊어... 그래. 이게 원래 내 모습’이라며 그 동안 노력했던 날들과 다짐들을 술과 함께 몸 속 깊숙이 삼켜버렸다 그렇게 재발이 되고 예전보다 더 건강이 악화된 나는 수술까지 받게 되었고 다시 2번째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또 한 번의 수술을 앞두고 있다. 암일지도 모르는 혹이 지금 술로 인한 그 동안의 생활에 벌을 주듯이 자라고 있다.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누가 이렇게 살라고 시킨 것도 아니며 억지로 강요한 것도 아니다. 나는 나를 스스로 이렇게 만들었다. 모든 결정은 내가 한 것이고 그에 따른 책임도 내가져야하는 걸 알고 있다. 첫 번째 입원 때 부모님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냐고 물으신 적이 있다. 나는 그냥 남에게 피해 안 주고 내 앞가림이나 하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인식하며 살고 싶다고... 하지만 지금 현재 나에게 남은 건 수 많은 기회와 믿음 속에서도 뒤에서 상대방을 보란 듯이 기만하며 비웃고 배신했던, 나를 믿었던 모든 이들을 실망시킨 날들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모든 일들은 술을 먹기 위한 핑계를 만들었던 것일 뿐이었다. 나는 내가 말한 대로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고 싶을 뿐이었다. 이것이 이렇게 힘든 것인지 왜 안되는 것인지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다. 부모님은 술을 핑계로 병원 입 퇴원을 반복하며 삶을 쉽고 편하게 살아가고 싶은게 아니냐며 그게 반복될까봐 두렵다고 하셨다. 나는 알고 있다. 남을, 부모님을, 치료진을 속일 수는 있어도 나 자신을 절대 속일 수는 없다. 내가 정말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지 아니면 퇴원을 위한 연극인지는 남을 속일 수 있어도 내 자신은 알고 있다. 난 내 인생의 반을 남에게 피해만 끼치며 살았다면 남은 인생의 반은 이제는 내가 도움은 못되더라도 걱정시키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중독은 의지로만 되는 것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독은 뇌질환이며 당뇨와 혈압처럼 평생 관리해야 하는 병이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 주위 모두가 힘들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선택은 자기 자신의 몫이다. 언젠가 나에게도 또 다시 충동과 갈망은 찾아올 것이다. 그게 언제라도 이겨낼 있게 그 순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를 생각하며 이겨낼 수 있게 이 수기를 쓰며 마음을 다잡을 것이다. 치료공동체의 구호처럼 ‘실패는 있어도 포기란 없다’ 그래야 할 것이며 음주의 유혹이 손을 뻗더라도 나를 위해, 아직 나를 믿고 도와주는 부모님과 주위 사람들이 항상 곁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그들의 먼저 우리의 손을 놓지 않게, 아직까지 곁에 있을 때 그들의 손을 꼭 잡아야 할 것이다. 나는 나를 포함한 모든 중독자들의 건강과 회복을 기원하며 음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날까지 다시 회복을 길을 걸을 것이다. 회복에 있어서 지름길은 없다고 생각한다. 오직 나 자신과의 싸움이며 꾸준함, 그것만이 방법 인 것 같다. 술로 인해 내가 저지른 잘못만큼 그 잘못의 백배 천배를 받는다 생각하며 꾸준히 가다보면 그 길의 끝에 회복에 성공한 나를, 음주로부터 자유로운 나를 찾게 될 것이다. 자랑할 것은 없지만 부끄럽고 싶지 않은 나의 인생의 길을 위해 오늘도 내일도 꾸준히 나는 노력할 것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이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면 된다. 회복의 첫 발을 내딛어 모두가 금주하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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