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랑 회복이야기


진료시간

평 일 09:30 ~ 18:00
토요일 09:30 ~ 13:00
점 심 12:30 ~ 13:30

※공휴일 휴무

진료안내

055)722.7000

친절한 상담을 약속드립니다.
한사랑 회복이야기
홈 > 한사랑 소식 > 한사랑 회복이야기

2019년 한사랑회복수기 장려작 -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간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민OO님 작성일19-08-24 10:55 조회18,336회

본문


나는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마셔선 안 되는 사람인거다.

내가 술맛을 알게 되고 술이 주는 쾌감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대학을 입학하고,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 서울에 살게 된 스무 살 때부터인 것 같다. 그 무렵을 대학 신입생의 설렘과, 서울이란 낯설고 한편으론 경이롭고 활기찬 환경에 매일 매일이 새롭고 흥분되던 시절이었다. 청소년기부터 충동적이고 산만했던 내 성격은 새 친구들을 사귀고, 이전에 접해보지 못했던 문화에 매료되면서 자연스럽게 매일이 술로 끝나는 생활을 하게 됐다. 더욱이 연극동아리에 가입하면서 ‘몰입’이라는 태생적 요소 덕에, 술자리는 대학 내내 당연히 강제되는 일상이었다. ‘극예술 연구회’라는 동아리 이름을 ‘그게 술 연구회’ 바꿔 부르며, 낭만과 예술에는 술자리가 반드시 행해야할 의식처럼 다들 믿고 충실히 임했다. 사건 사고는 당연히 많았다. 과도한 음주로 폭행사건, 추락사고, 무단횡단 교통사고 등 무수히 많은 불행한 일들이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취중에 저지른 장난으로 당시(1989년)에 전 국민을 긴장시켰던 연쇄방화사건의 용의자로 후배 두 명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아무튼 학과 수업은 수시로 빼먹고 시험공부도 등한시해 가까스로 졸업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당시는 88서울 올림픽 직후의 호경기라 유명 식품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인사과에 배치되어 몇 개월이 지나고, 난 백화점 영업부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대학교 선배인 영업부 과장님께 부탁하여, 입사할 때부터 외근이 잦고 활기찬 분위기에 내심 부러웠던 부서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다. 업무는 내가 맡은 백화점 몇 곳의 매출과 판매사원관리였다. 백화점은 굉장히 변화가 심한 곳이다. 경쟁은 치열하고 각 제조업체들의 신상품 홍보와, 보다 넓고 잘 보이는 위치 좋은 판매대를 확보하기 위한 전쟁터이기도 하다. 이런 환경은 백화점 측 구매 담당자와 제조업체측 영업담당자간의 빈번한 접촉과 끈끈한 유대를 요구한다. 그 조건을 얼마나 충족시키느냐가 운명을 좌우한다. 영업의 꽃은 ‘접대’다. 그렇게 선임자에게 배웠고 나의 생각도 같았다. 술자리에서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으로 마칠 때 까지 응대하고 접대자리가 파한 후 상대를 차에 태워 배웅하고 나면, 피로감과 갈증으로 포장마차 등지에서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다음날 아침 사우나로 직행해 같이 씻고 해장국 한 그릇으로 접대를 마감하는 일상이 백화점이란 특수성으로 주말이나 공휴일 가리지 않고 계속 되었다.

접대와 각종회식, 새벽의 귀가는 부서 전 직원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고, 회사 정기 건강검진에서는 거의 대부분 위장질환과 지방간 판정을 받았다. 그렇게 나의 20대 후반과 30대 중반의 시기는 지나갔고, 그 사이 결혼을 하고 첫아이를 낳았다. 몇 년 후 울산 영업소장으로 발령 받아 업무는 과중해졌고, 실적에 대한 압박감도 심해졌다.

처음 개설된 영업소의 초대 장(長)으로서의 책임감과, 차장 승진을 앞둔 시점의 중압감으로 장말 열심히 일했다. 쉬는 날에도 매장을 돌며 판매사원을 독려하고 각종 판매행사를 챙겼다. 일 중독자처럼.

가정에 소홀했고, 타향살이와 육아에 외롭고 힘들어했던 아내는 잦은 친정나들이가 길어지면서 사실상 별거 상태가 되었다.

판매사원들의 노조결성에 지지적 입장을 밝힌 것이 화근이 되어 승진에서는 누락되고, 영업본부장과 갈등이 생겨 퇴사하게 되었다. 과거 나를 영업부로 데려가 조직에서 항상 나를 지원해줬단 대학교 선배 본부장과의 불화는 참기 힘든 배신감을 남겼다.

고향인 부산에서 가맹점업주였던 친한 형과 커피도매상을 동업으로 시작했다. 일을 마친 후 매일 저녁 거래처 문제를 얘기하며 술을 마셨다. 음주운전은 다반사였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기 위해선 전날 주차한 곳을 찾아 헤매 다녀야 했고, 어떤 날은 큰 도로에 역주행 방향으로 서 있는 차를 발견하고는 차를 쓸어내렸다. 지금 생각하면 면허정지 한 번에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다.

아들은 ADHD 판정을 받았고, 아내와의 별거생활은 두 번의 재결합과 헤어짐을 겪으며 결국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대학교 2학년 때 만나 20년 가까이 맺었던 인연인 서로에 대한 무관심과 불편함속에서 끝나버린 것이다.

술을 마시는 시간은 점점 늘어났다. 평일에는 사업관계로 동료 거래처 사람들과 함께 주말에는 혼자 영화를 보거나 늦은 점심식사를 하면서 마셨다. 냉장고에는 늘 술이 가득했다. 평생 술·담배를 하지 않으신 아버지 때문에 가족 외식이나 부모님 댁에서의 음주는 눈치껏 해야 했다. 또 다른 인연으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우리는 서로에게 솔직했고, 그녀에게 많은 위안을 얻었다. 아내도 술을 즐겼는데, 나를 만난 이후에 주량도 빈도도 늘었다. 임신 사실을 알고부터 술을 딱 끊어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후 동업자에게 사업을 넘기고 우리는 아내의 친정이 있는 김해로 이사했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었다.

술을 좋아하는 처남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작은아이가 이유식을 시작할 무렵에 아내는 장모님과 함께 집 근처에서 음식점을 시작했다. 육아는 내 몫이었다.

아내와 같이 가게에 출근해 아침을 먹고 난 후부터, 점심식사시간을 제외하곤 나머지 시간을 유모차를 끌거나 차 뒷 자석에 아이를 눕히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심심하고 외롭고 짜증도 났다. 아이가 잠들면 공원 벤치나 차안에서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처가를 빼곤 아는 사람도 없고 다른 일을 시작할 엄두를 낼 수 도 없던 나는 다람쥐 쳇 바퀴 도는 식의 무의미함속에서 무력감과 갑갑함을 잊고자 술 마시기에 열중 했다. 힘든 모습으로 귀가한 아내가 짧은 대화 후에 잠자리에 들고나면, 가게에서 가져온 음식으로 TV를 보며 술을 마시다 취해 잠들었다. 아내가 힘들어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나에게 무관심한 것만 같아 화가 났고, 그 원망은 점차 장모님에게로 옮겨 갔다. 이런 불안정한 상태에서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중학교 3학년이던 첫 아들이 빗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에서 전처와 살던 아들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알 수 없는 반항을 하고 등교거부를 하다가 급기야 가출을 했다. 집으로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처방 받아온 ADHD 약은 먹지 않고 버렸다. 말과 행동은 더욱 거칠어지고 조그만 자극에도 물건을 내던지고 부수며 온갖 폭언으로 엄마를 위협했다. 속수무책으로 당황한 전처와 아이의 외가식구들은 아들이 요구하는 무엇이든 사주며 비위를 맞추려고 애썼다. 겨우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까지 첫 아들의 문제행동에 끌려다닌 그들은 지치고, 절망감에 망연자실한 심정으로 그제야 나에게 사실을 알리고 서울로 불렀다. 아들은 고등학교에도 적응하지 못했고, 이미 주위의 누구도 제어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아침이면 등교문제로 난장판이 되고, 저녁에는 아수라장 같은 집으로 경찰이 출동했다. 결국 고민 끝에 큰아들을 서울대 병원 소아정신과 병동에 입원시켰다. 보름 정도 지난 후에 퇴원한 아들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약도 안 먹고 다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외래진료라고 속이고 겨우 달래서 병원에 데려가 재입원 시켰다. 소아병동의 맨 윗 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까지 보안요원들에게 끌려가며 “아빠, 안돼. 하지마”라며 울부짖던 아들의 모습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가슴 저미는 아픔으로 남았다. 그 사이 서울과 김해를 오가던 나는 아내와 상의 후에 몇 주후 퇴원한 큰아들을 김해로 데려왔다. 부산 할아버지 집도 싫고, 나랑 새 엄마랑, 동생이랑 같이 사는 것도 싫다며 오로지 독립만을 원했다. 전학한 고등학교 가까이에 원룸을 얻어주고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한 날들이 시작됐다. 학교를 보내고, 청소며 빨래를 해주고, 저녁을 챙겨주고 나서, 큰 처남 집에 맡겼던 작은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하루가 그냥 지나갔다. 점심나절부터 홀짝거린 술은, 작은 아이를 재우고 나면 아예 병째 들이쳤다. 술 사 오기도, 빈 술병 버리기도 귀찮아 큰 페트병으로 사 마셨다.

종일 제대로 된 식사는 한 끼도 하지 않고 오로지 술로 배를 채웠다. 맥주와 막걸리는 배가 불러 소주만 마셨다. 큰 아들 때문에 점차 눈치가 보이던 나는 취기가 오르면 마구 전화를 해대기 시작했다. 큰아이는 받지 않았고, 가게 마무리로 바쁜 애꿎은 아내에게 시비를 걸었다.

자꾸 꼬이고 혀로 횡설수설하며 온갖 술주정을 해댔다. 그리고 끝이었다. 엉망으로 취해 잠들었다. 아내가 언제 들어왔는지, 내가 전화로 무슨 얘길 했는지, 아내가 담배 냄새가 싫다고 해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잘 때면 어김없이 하던 양치질은 했는지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찌그러진 페트병과 쓰고 난 휴지들로 어지러운 거실에서 이른 아침 깨어나면 죄책감과 불안한 마음에 휩싸여 조용히 집을 빠져나왔다. 마침 집 앞에는 조그마한 공원에 있었는데, 전날 마시고 남은 술이 있으면 들고 나와 마시고, 없으면 아내의 가게로 향했다. 내게로 가게 열쇠가 있어서 아무도 없는 가게 구석자리에서 마음껏 술을 마실 수 있었다. 그래도 예전엔 이리저리 해장국집을 많이 찾아다녔지만 해장술은 마시지 않았다. 할 일이 있었고, 아침부터 술 생각은 그다지 없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아침에 눈뜨면 술 생각은 간절했고, 조급한 마음으로 술을 찾았다. 안절부절 초조하고 애타는 마음은, 급하게 식도를 따라 내려 보낸 술이 배와 가슴, 머리속에 차례로 뜨거운 열기를 퍼트리면 깊숙이 가라앉았다. 마치 은빛으로 반짝이며 시퍼렇게 살아 펄떡이다가 이윽고 소금에 푹 절여져 버린 간 고등어처럼 눈을 풀어지고, 무감각해졌다. 그 순간들만큼은 현실의 고통도,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그저 바라볼 수 있는 시시한 것들로 여겨졌다. 하지만 잠들고 일어나 술기운이 떨어지면 다시 간절히 술을 찾았다. 아내는 가게로, 큰아이는 학교로, 작은 아이는 어린이집을 거쳐 큰 처남 집으로 모두 가버리고 홀로인 나는 술에 빠지고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잠든 시간을 빼곤 하루 종일 술에 취해 혼자만의 세상 속을 헤맸다. 다른 것에는 관심도 없었고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잠에서 깨는 게 너무 싫었고 아침에 해 뜨는 것이 두려웠다. 휘청거리고 비틀거리면서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아침엔 가게를 엉망으로 만들고 갖가지 빈 술병으로 가득한 차안에서 마시고 잠들었다. 공원 바닥에 취해 쓰러져 잠든 모습을 이웃여자가 보고 아내에게 알리기도 했다. 급기야 수시로 연락이 안 되는 나를 아내는 공원에서 주차된 곳으로 여기저기 찾아 다녔다. 얼마나 수치스럽고 힘들었을까, 그랬지만 그때는 몰랐다. 술을 못 마시게 말리고 울고불고하는 아내에게 오히려 화를 내고 막말을 쏟아냈다. 절대 하지 말았어야 했을 말들과 내 가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모르는 적대감이 무참하게 아내를 짓밟았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작은 아이는 겁을 먹고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날 보며 울어댔다. 놀라 김해로 달려오신 어머니와 형은 부산에 있는 종합병원에 날 입원시켰다. 검사결과 급성 알코올성 간염이었다. 눈알은 노랬고 명치와 오른쪽 갈비뼈 밑은 단단하게 부어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느끼지 못했다. 병원에서 3주간 지낼 때, 불면증으로 고생하던 나는 정신의학과 협진을 요쳥했고, 큰 아들이 초등학교 시절 ADHD 진료를 받기도 했던 의사선생님을 만났다. 그분도 나를 알아보시고 반갑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약이 술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OO님은 술을 드시면 안 되는 분입니다” 라고, 불면에는 술보다 수면제가 낫다는 얘기는 쉽게 받아들여졌지만, 내가 솔을 조금이라도 마시면 안되는 사람이란 말은 수긍이 가지 않았다. 가계가 쉬는 날이면 작은 아이를 데리고 아내는 두 시간이 걸리는 병원에 날 보러 왔었다. 난 부끄럽고 미안했다. 다시는 술 먹고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아내를 위로했다. 퇴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술버릇은 다시 시작됐다. 더하면 더했지 나아지지 않았다. 이웃들의 눈치도 보이고 날씨도 더워져서 집에서 아침부터 거리낌 없이 마셨다. 아빠의 무관심과 낯선 곳에서의 외로움으로 힘들었을 큰아들을 한 학기를 채우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뒀다. 더 이상 큰아이가 김해에 있을 이유도 없어졌고 내가 어떻게 돌봐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큰아들은 남양주에 있는 기숙형 대학입시학원을 원했고, 그렇게 내 곁을 떠나갔다.

폭풍이 모든 것을 한순간에 뒤흔들고 휩쓸어 가버린 뒤처럼 멍한 상태로 술만 마셔대는 나를 보고 처가 식구들은 진저리를 쳤고, 아내는 매일 밤 슬피 울었다. 마시고 토하고 또 마시던 나는 결국 피를 토했다. 화장실과 거실 곳곳에 적포도주같이 검붉은 피를 내뿜고 쓰러졌다. 턱이 찢어져 피가 흐르고 의식은 가물거렸다. 잠이 든 거 같은데 현관문이 열리고 놀라 소리치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참 전부터 전화를 안 받아 불길한 예감이 들어 급히 달려온 것이다. 119 구급차가 오고, 응급실로 향하는 차안에서 혈압이 위험할 정도로 낮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다. 응급실에서 수혈을 하고 턱을 꿰맸다. 심한 토악질에 식도가 찢어졌다고 의사가 말했다. 중환자실로 옮겨져 소변 줄을 꽂고 기저귀를 찼다. 시도 때도 없이 혈변이 나왔다. 식도의 찢어진 부분에서 출혈이 멈춰야만 수술이 가능했다. 수술 후에도 상처가 아물 때까지 조심해야 된다고 했다. 식사는 물론 물 한 모금도 마시면 안 되었다. 중환자실은 하루 종일 천장의 환한 조명이 켜져 있었고 수면제 없이 잠들 수 없는 나는 불면에 시달리며 환각을 경험했다. 환청, 그 환시 내시경 수술을 하고 일반병실로 옮겨서도 물, 음식도 먹을 수 없었다. 며칠 후 내시경으로 수술부위를 검사하고서야 식사가 가능했다. 퇴원 후 부산 부모님 댁으로 혼자 들어갔다. 처가와도 사이가 벌어졌고, 무엇보다 아내가 원했다. 아버지와 함께 지내면 술을 덜 마실 거라 생각한 거다. 어머니가 더 완강하셨다. 가진 돈이 떨어지자 아내도 어머니도 돈을 주지 않았다. 겨우 담배 값만 타냈다. 김해에 있을 때는 돈이 없어도, 가게에 가면 얼마든지 술이 있고, 작은 애 저금통을 깰 수도 있었다. 담배 살 돈으로 술을 사먹고, 담배는 길거리에서 얻었다. 지하철 역 부근이나 동네시장 근처에서 흡연하며 지나가는 남자들을 상대로 구걸한 셈이다. 그래도 술값은 모자랐다. 생각해낸 것이 비교적 규모가 큰 음식점과 동네마트의 주차장에 쌓아둔 술 박스였다. 바쁜 시간이면 눈치를 살피며 슬쩍 들어가 준비해간 검은 비닐봉지에 2-3병씩 넣어서 훔쳤다. 대담해진 나는 음식점 안에서 손님을 찾는 척 두리번거리다가 음료냉장고에 들어있는 소주병을 몰래 꺼내들고는 화장실에 가 문을 잠그고 마시기도 했다. 이것을 수상히 여긴 직원에 의해 또다시 같은 짓을 하다가 들켰다. 용서를 빌자 주인여자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다시는 하지마라’는 말과 함께 순순히 보내줬다. 창피함을 몰랐다. 훔치고 구걸하고 부랑자의 모습으로 살았다. 돈이 생겨 술을 사면 아파트 옥상이나 지하주차장에서 마시고, 남은 술은 계단에 있는 소화전 안에 숨겨뒀다. 손을 심하게 떨었다. 국을 떠먹기가 어려워, 국그릇에 입을 갖다 대고 마셨다. 제사상에 올리는 술잔을 받쳐 들고 걸음을 옮기는데 절반을 쏟았다. 제사가 끝나면 다른 식구들 모르게 퇴주잔의 가득한 술을 한꺼번에 다 마셨다. 그리곤 시치미를 뗐다. 술기운이 떨어지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나고 불쾌감이 밀려왔다. 급하게 술을 찾아 마시는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소주를 반병쯤 들이켜야 진정이 되었다. 사실 겁도 났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수는 없지 않는가, 피를 토하고 병원에 입원했던 그 끔찍했던 기억을 다시는 되풀이 하고 싶지 않았다. 가끔 김해에 작은 아이를 보러 간다는 핑계로 가곤 했다. 어느 날 아침 아내가 가게에 필요한 수산물을 사러 부산 자갈치 시장에 같이 가자며 나를 깨웠다. 아내는 운전을 못한다. 차에 시동을 걸어놓고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오겠다고 얘기하고는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주류냉장고에서 차가운 소주를 꺼내 만원을 직원에게 내밀고는 그 자리에 서서 그냥 한 병을 다 마셨다. 단숨에.. 아무렇지도 않게 차로 돌아와 출발했다. 무슨 요일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큰 도로가 밀렸다. 사이 길로 접어들어 얼마쯤 가다보니 병원이 보였다. 알코올질환 전문병원 한사랑병원이었다. 내가 예전과는 다르게 술로 인한 문제가 심각해졌다고 그 즈음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망설임 없이 들어섰다. 접수하고 진료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1층 로비에 있는 중독 자가 진단표를 봤다. 모든 문항에 해당되었다. 주치의 전형곤 선생님과의 첫 만남에서 우울증을 동반한 알코올의존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선생님은 입원을 권유하셨고, 가족과 상의해보겠다고 말씀드리고 진료실을 나왔다. 지금도 가끔 읽어보곤 하는 ‘가리사니를 위하여’를 한권 사고 병원 앞마당을 나와 아내에게 입원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그때가 늦가을 쯤이었던가, 쓸쓸하고 황량한 주변의 풍경이 너무 서글프다며 아내는 눈물지으며 싫다고 말했다. 하지만 몇 달후 한사랑병원에 첫 입원을 했다. 못 견디고 하루 만에 퇴원했다. 그 후로 입 퇴원을 반복하고 올해 5월 중순에 열 번째 입원을 했다. 초기 몇 번의 입원시기에는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초조함으로 항상 경직된 자세로 지냈다. 문득 어깨와 목을 움츠리고 있단 걸 느끼면 한숨과 함께 진장을 풀려고 애썼지만 이내 자신도 모르게 다시 돌아갔다. 같은 병실 환우들과 충돌도 잦았고, 교육이 없는 주말에는 무료함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은 토요일 오전의 힐링시네마였다. 입 퇴원이 거듭되면서 가족들에게도 나에게도 대수롭지 않은 행사가 되어갔다. 병원은 바깥세상에서 술에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정신이 맑게 돌아오는 휴식처 같은 곳이 되었다. 햇수가 지나가고, 횟수가 늘어나면서 병원생활도 점차 편안히 느껴졌고, 친하게 지내는 환우와 간호사, 복지사도 생겼다. 반복되는 교육과 주치의의 충고에도, 마음속으로는 절주를 꿈꾸었다. 평생 술을 안 마시는 생활을 머릿속에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내 AA모임에 참석하면서 단주를 유지하고 있는 멤버들이 처절하게 겪었던 절주의 망상과 실패에 대한 경험담을 듣고서는 내 가슴 속에는 신념처럼 ‘절주’가 굳어있었다. 순응을 가장한 자기기만적 태도와 말로 치료진과 환우를 가족까지도 속였다. 외박을 나가면 술을 마셨고 귀원할 때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는 듯 행동했다. 교활했으며 오만했고, 정직하지 못했다. 병원ㅇ서 퇴원한 환우가 얼마 후 사망했다는 소식과, 퇴원 며칠 만에 다시 강제로 입원당하는 환우들을 접하면 안타까우면서도 답답했다. 왜 절주가 안 되는 걸까, 약 챙겨먹고 눈치껏 적당히 술 마시면, 몸도 망치지 않고 억지로 병원에 끌려오는 일도 없을텐데.. 나의 진정성 없고 교만한 사고방식은 퇴원이후 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번번이 조절에 실패하고 만신창이로 취해서 입원했다. 언젠가부터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느낌을 넘어, 언제까지고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위기감이 강하게 몰려왔다. 어찌 보면 단주가 절주보다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라는 책제목처럼, 눈치 볼일도 없고 다른 사람들과 일들과도 마주할 수 있지 않은가 당당하게 말이다. 나의 술 문제 해결에 대한 인식은 많이 달라졌다. 자꾸만 고개를 드는 양가감정에 다시 수차례 좌절했지만 신념만큼은 확실히 변했다. 담당 복지사가 추천한 실행가능하고 실질적인 회복의 여정을 제시하는 도서들과 특히 수용전념치료(ACT)를 통해 참된 회복의 모습을 조금씩 그려보기 시작했다. 나의 조건과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이전과 다른 새로운 관점에 눈뜨게 되었다. 지나간 아홉 번의 병원생활도 나름의 교훈과 의미가 있다. 많은 것을 배웠다.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으로 건강해지는 긍정적 사고와 습관들의 힘, 버려야 할 것들과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 공동체 생활에서의 절제와 배려하는 마음, 퇴원후의 회복유지를 위한 꾸준한 AA참여와 외래진료의 필요성, 가족과 나의 소중함,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정직하게 겸손하게 실천하기! 조각난 나와 가족의 삶을 치유하고, 모두의 안식처를 갖고 싶다.

내가 변함으로써 가능한 꿈이다. 강의 물결이 단 한순간도 똑같이 흘러가지 않듯이 인간도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변화한다. 변화는 급격하게 일어나기도 하고 서서히 진행되기도 한다. 나는 후자인 거 같다. 아니 내가 변화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자신과 나를 여전히 지지하는 가족, 친구들이 변화의 과정을 느끼고 이해하는 데에는 인내와 상호작용이 필요한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무엇’을 하던지, ‘무엇’을 ‘왜’ ‘어떻게’ ‘누구와 함께’ 하는 지를, 그 ‘무엇’의 목적과 과정을 계속 알아차림하는 것은 성취에 있어 매우 효과적이다. 책의 머리말과 목차가 맨 앞장에 있듯, 마치 보디빌더가 거울을 보면서 끊임없이 포즈를 교정하고 트레이너와 함께 근육을 단련하듯이, 회복의 과정은 장거리 허들 달리기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수히 많은 장애물이 우릴 힘들게 할 거지만, 그 심리적 허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낮아지고 뜸해질 것이다. 끝으로, 어느 책에선가 읽은 적이 있는 글귀 ‘ 진정한 자유란, 세상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안 하는 것이다’를 명심하면서 조급하지 않게 ‘한 입 크기’의 변화를 지금 여기에서 주저 없이 실천해 나갈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만큼, 어쩔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주소서!

 


브라우저 최상단으로 이동합니다 브라우저 최하단으로 이동합니다